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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관순

류관순(柳寬順)

1902년∼1920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흥(高興). 충청남도 천안 출신. 아버지는 중권(重權),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며, 5남매 중 둘째 딸이다.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비생으로 입학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그뒤 일제가 이화학당을 휴교시키자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이곳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의 마을지도자를 규합하여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 이해 음력 3월 1일 아오내〔並川〕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날 수천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이 시위 전개에서 잔인한 일본헌병의 총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아오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시체를 인도하였다. 시체를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해방후 시체를 찾을 수 없어 초혼묘(招魂墓)를 설치하였다.

류관순기념사업회가조직되었고. 류관순 기념관. 류관순 동상이 전국 수처에 건립되어 열사의독립투혼을 선양하고 있으며 류관순 장학회등이 운영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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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편집 류도산

* 朗惠 柳志世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04-07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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