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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류일한

류일한(柳一韓)
                                           

1895년∼1971년. 기업가.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 아버지는 상인이었던 기연(基淵)이며, 어머니는 김확실(金確實)이다.9남매 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

1904년 9세 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고학으로 미시간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상학석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스탠포드대학원에서 3년간 법학을 전공하였다.

학업을 마친 뒤 전자회사 사원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1922년 자립하여 숙주나물을 취급하는 라초이식품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25년까지 50여만 달러의 거금을 벌었다.

1926년 3월에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하였다. 그해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1934년에는 독일의 도마크(Domagk, G.)박사에 의하여 개발된 ‘프론토실(Prontosil)’을 동양에서 제일 먼저 도입하였다.

1939년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였고, 이 무렵에 사세도 확장되어 만주·다롄·텐진등 동북아 일원에 걸치는 방대한 시장을 확보하였다.1939년 사업상의 이유로 도미하였으나, 1942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귀국하지 못한 채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였다. 유한양행은 1953년 휴전 이후 계속 성장하여 성실한 우수약품생산업체로서 안정된 지위를 구축하였다.

유한양행마큰는 류일한이 귀국하여 독랍운동가 서재필박사를 찾아뵈었다. 이때 서박사는 영애가 손수 목각한 버드나무 목각화를 선물로 주었다. 모진 비바람에도 무럭무럭 자라는 버들처럼 기업이 잘되라는 뜻을 담은 이 작품이 오늘의 심벌마크다.

제약회사이외 몇개기업을 거느리고 있으며 유한고등학교와 유한대학 도설립 운영하고있다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하여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조권순(趙權順)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전문경영인 등장의 길을 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1971년 3월 76세로 타계하였다. 산업동탑훈장을 받았으며,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참고문헞; 기업가 류일한에 관한연구. 한국경영사연구. 유한오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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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1)

유일한(柳一韓, 1894년 12월 13일~1971년 3월 11일)은 아버지 류기연과 어머니 김기복여사사이에 평양남도평양부에서 출생하였다.

주식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인으로, 본명은 유일형이다. 배우자는 호미리여사이다. 종교는 침례교.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했으며,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현재 유한공업고등학교경기도 부천시 괴안동 사이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동차 도로가 있다.

유년시절

유일한은 1895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5년, 당시 9살에 불과한 큰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류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을 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에서 아버지가 환전해준 미국 돈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서 읽기와 기도를 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팅스 소년병 학교1909년 입학한 그는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나중에 어른이 되었을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때 일본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편집] 대학교생활

네브레스카 주립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다. 이를 안 아버지는 '내가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냈지, 운동부에서 활동하라고 보낸 줄 아느냐'면서 꾸짖었지만, 유일한은 '미국 대학교에서는 운동을 못하면 공부를 못합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부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어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여하였다. 1922년에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대학 상학 석사

[편집] 식품사업가 시절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 1925년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편집] 유한양행

1926년 서울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회사 경영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사건때문이었다. 부모는 큰 아들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이나 민중작가 최서해소설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그래서 유일한은 한민족의 건강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특히 안티푸라민은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1]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경영을 실천하였다. 그 이유는 라초이사 경영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녹두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탈세하지 않았으며, 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사원의 유혹을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는 꾸짖음으로 물리친 일화가 있다.[2] 1929년 유한양행은 한국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였다.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에는 고려 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다.

<사업가, 독립운동가>

재산의 사회환원

독실한 기독교 (침례교)신자인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하느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직업교육기관인 유한공업고등학교유한공업전문대학의 운영하였다. 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 즉, 손녀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유일한이 살던 은 겉은 붉은 벽돌로, 내부는 목재로 지어졌으며, 현재 건물 소유주인 성공회대학교에서 신학연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또한 그의 사회기여로 세워진 유한공업고등학교는 성공회대학교를 마주하고 있다.

 

(주)유한양행을 모기업으로 하여 성장한 제약기업체군.

주요 사업은 의약원료, 각종 의약품, 의약관련공업 등의 종합의약업이며, 창업자는 유일한(柳一韓)이다. 모기업 (주)유한양행은 종합의약품 제조·판매·수출입업체로서 1926년 12월 창립되었으며, 이후 1933년 만주에 유한창고를 개설했다. 1936년 6월 법인등록을 마치고 현재의 부천 지역에 대규모 공장을 건립하는 등 사세(社勢)를 확장해나갔으나 8·15해방 이후 국토분단과 국가소유변경으로 해외 및 북한지역의 재산을 상실했다. 이후 1962년 8월 외국의 8개 유명제약회사와의 기술제휴 등으로 사세를 확장시킨 후 국내 제약업계를 선도해왔다. 1962년 11월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73년 11월 항결핵제 리팜핀 원료 합성, 1976년 4월 이탈리아 릭타라보리토리사와의 기술제휴로 초기임산부에서 태반성성선자극(胎盤性性線刺戟) 호르몬 추출 성공, 1970년 12월 경기도 군포에 대규모 공장 건립, 1984년 6월 중앙연구소 준공, 같은 해 10월 항결핵제 원료 라라진아미드 합성 성공, 1985년 4월 한국우수의약품제조관리기준(KGMP)에 따른 적격업체 선정, 1988년 9월 제3세대 세파계열 항생제 '세프피란' 개발, 1989년 4월 위장치료제 '유한로섹' 생산, 1990년 5월 충남지역 사옥 준공, 1991년 8월 임산부종합영양제 '미네랄 A' 생산을 개시했다. (주)유한양행의 주요 사업은 종합의약품업, 특산품수출업, 식료품 및 생활용품 제조판매업 등이다.

유한양행그룹은 1970년 3월 미국 킴벌리클라크사와 합자하여 유한킴벌리(주)를 설립했으며, 1971년 3월 그룹 설립자의 뜻에 따라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제정했고, 1980년 7월 한국기술진흥(주)과 합자하여 유한화학공업(주) 설립, 1982년 11월 미국 사이나미드사와 합자하여 유한사이나미드(주) 설립, 1983년 5월 벨기에 얀센사와 합자하여 (주)한국얀센을 설립했다. 1998년 세계 최초로 자체 개발한 면역억제제 고형분사 기술을 미국의 쉐링푸라우사에 수출했다. 계열회사로는 모기업 (주)유한양행 외에 유한사이나미드(주)·(주)유한메디카·(주)유한크로락스·유한킴벌리(주)·유한화학공업(주)·(주)한국얀센·유한씨앤티·쉐링푸라우코리아(주)·인도현지합작투자사인 G.T.B.L 등이 있다. 그밖에 재단법인 유한재단, 학교법인 유한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각 계열회사들은 지분참여만 있을 뿐 독자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49번지 6호에 있다.→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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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편집. 류도산

* 朗惠 柳志世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1-04-0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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