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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문흥군(류사원)철권(2)


 

<img src="http://pudding.kr/yujise/20364034">

문흥군 철권

上:3등 인명록
下:제작=최경선 / 글씨=한호(한석봉)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해설


번역 각주


1) 군사를······이루었다:《시경(詩經)》 진풍(秦風) 무의(無衣)에 “어찌 옷이 없다 해서 자네와 포를 같이 입으리요?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우리들 창과 모를 손질하여 자네와 같이 원수를 치리.[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修我戈矛 與子同仇]”라고 하였다. 옛날 초(楚) 나라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 조정에 구원병을 청할 때 7일 동안 곡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신포서와 같은 충정으로 중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말이다.


2) 상을······마땅하다:《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의 “덕을 힘쓰는 자에게는 관직을 주어 장려하고, 공을 힘쓰는 자에게는 상을 주어 장려한다.〔德懋懋官 功懋懋賞〕”에서 인용한 말이다.


3) 반당(伴倘) : 조선 시대에 왕자ㆍ공신ㆍ당상관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려준 병졸.


4) 구사(丘史) : 종친이나 공신에게 하사한 관노(官奴).



참조 <<조선왕조실록>> 선조조 기록


선조 29년 병신(1596, 만력 24) 11월 12일(갑진)

고급 청병 주문사(告急請兵奏聞使) 정기원(鄭期遠), 서장관(書狀官) 유사원(柳思瑗)이 떠나려 하니, 정기원에게 전교하였다.

“이 일은 매우 급하니, 밤낮을 가리지 말고 빨리 길을 곱잡아 가라.”


선조 36년 계묘(1603, 만력 31)  8월 17일(경자) 

공신 도감이 아뢰었다.

“전일 군사를 청하거니와 군량을 청하여 허락받은 사신(使臣)을 아울러 녹공하라고 전교하셨으므로 정곤수(鄭崑壽)를 임진년에 군사를 청한 사신으로 이미 계품하여 녹공한 이외에 병신년 11월에 군사를 청한 사신 정기원(鄭期遠), 서장관(書狀官) 유사원(柳思瑗)과 정유년 정월에 군사를 청한 사신 권회(權恢)를 아울러 수록하여 마련하였습니다. 군사를 청할 때에 공이 있었던 통사(通事)도 아울러 기록해야 한다는 분부가 계셨으므로, 각 행차마다 한윤보(韓潤甫)·이해룡(李海龍)·임춘발(林春發)·홍순언(洪純彦)·표헌(表憲) 등 한 사람씩 아울러 수록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이 계사(啓辭)는 6월에 입계하였는데 오늘 비로소 내려졌다.】


선조 37년 갑진(1604, 만력 32) 10월 29일(을해)

선무 공신의 교서를 반급할 때에 선독한 별교서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을 3등(三等)에 봉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한 자급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그 녹봉을 잃지 말게 할 것이며,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게 하라.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채경선(蔡慶先)에 대하여
1559년(명종 14)∼1610년(광해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자장(子長), 호는 죽촌(竹村). 채자침(蔡子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중경(蔡仲卿)이고, 아버지는 채난종(蔡蘭宗)이며, 어머니는 유돈(兪燉)의 딸이다. 부인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민여건(閔汝健)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을 역임할 때 《명종실록》 편찬시 편수관을 맡았으며, 선조대에는 호조좌랑, 홍문관부수찬, 사헌부지평, 평안도 수검어사(搜檢御使), 사헌부지평, 이조좌랑,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호조좌랑 등의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다.


한호(韓濩)에 대하여
1543년(중종 38)∼1605년(선조 38). 조선 중기의 서예가.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 군수 대기(大基)의 5대손으로, 정랑 세관(世寬)의 손자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현령(歙谷縣令)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그의 묘갈에 의하면, “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되는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贊)·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晋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천분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공(工)과 힘(筆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는다 하여도 동기창(董其昌)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러한 경지는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김정희(金正喜)는 말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제도가 이루어졌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 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忭墓表額), 과천(果川) 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 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 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鄰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 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평하였다. 그로부터 비롯되어 사자관체(寫字官體)라는 서체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干祿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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