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포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디 패스워드    
 
   
 
     
 

          
View Article  
  작성자  편집인
  파 일 1  js0999.jpg (111.1 KB) Download : 4
  파 일 2  js0429.jpg (46.6 KB) Download : 8
  제    목  문양부원군 류자신 1등 衛聖功臣 敎書(류희분2등.류희담3등)


문양부원군은 衛聖功臣 1등에

2등에는 妻男 鄭昌衍(東萊鄭氏 임당 鄭惟吉의 子)
과 3남 文昌府院君 兵曹判書 柳希奮

3등에는 2남 文原君 柳希聃과 사위 漢昌君 趙國弼

衛聖功臣敎書

古貴 軸 951.052-W755

光海君 命 찬, 1613년(광해군 5).

1축, 필사본, 43.5 291.3cm.


柳自新 등을 衛聖功臣 1등에 錄勳하는 敎書.


衛聖功臣敎書는 壬辰倭亂(壬辰 선조25 1592년)때 6月 13日 寧邊에서의 廟議에서 宣祖는 王世子인 光海君 琿에게 內禪 즉, 國事를 權攝케 할 것을 決意하고, 宣祖 自身은 萬一의 경우 遼東에 들어가서 內附해서라도 援兵을 請하기로 했다. 이것이 곧 光海君의 分朝策(1592.6.13~1593.1.20 7개월 만에 폐지됨)이었다. 이에 光海君은 宗廟, 社稷의 神主를 받들고 分朝의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伊川 全州로 光海君을 扈從하였던 관원들에게 光海君 즉위(1608년) 5년 후 1613년(光海君 5)에 내린 功臣號이다.

1등에는 당시 領議政 崔興源, 左贊成 鄭琢, 副提學 沈忠謙, 同知中樞 柳自新, 尹斗壽, 李恒福, 尹自新 등 10명으로 竭忠盡韶德贊謨佐運衛聖功臣이라 하였고, 2등은 竭忠盡韶德贊謨 衛聖功臣이라 하여 柳自新의 三男인 柳希奮, 妻男 鄭昌衍, 刑判 李憲國, 承旨 柳希霖 등 16명을, 3등은 竭忠盡誠衛聖功臣이라 하여 柳自新의 二男 判決事 文原君 柳希聃, 柳自新의 女壻이자 王의 손위 同壻인 漢昌君 趙國弼외 52명을 각각 책록하였다.

이들 중에는 이미 扈聖功臣에 책록된 者도 다수 있었다.

柳自新은 字가 止彦이고, 判書公 柳潛의 長子이다. 壬辰倭亂 후 15대 光海君(三女=王妃)이 즉위하자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 文陽府院君에 진봉되었고 三男 柳希奮은 후에 漢城判尹,兵曹判書을 지낸 文昌府院君이고, 二男 柳希聃은 判決事 文原君이고 女壻 漢昌君 趙國弼이며, 文陽府院君의 손아래 妻男 左議政 鄭昌衍이다.


歷史 事實 記錄을 綜合하여 柳 志 世 編輯

yujise@paran.com | 017-208-6566

이제는 다년초와 벗 삼아야지!


 


1등 10명 柳自新(文陽府院君. 332代 漢城判尹)

2등 17명 柳希奮(文昌府院君. 兵曹判書. 364代 漢城判尹)---柳              自新(文陽府院君)의 三子

          鄭昌衍(左議政)---柳自新(文陽府院君)의 손아래 妻男

          즉 東萊鄭氏 蓬原府夫人의 男동생

3등 53명 柳希聃(文原君. 掌隷院 判決事)---柳自新(文陽府院君)            의 二男

          趙國弼(漢昌君. 郡守)---柳自新(文陽府院君)의 큰사위

위 衛聖功臣敎書(1613년) 의 근원 역사 기록

同知中樞 柳自新·


중국 정사 조선전


光海君의 分朝活動 및 全羅道에서의 軍務·民政의 復興에 대한 努力 등을 들어 顯著한 功을 세웠기에 後嗣로 삼음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令次子琿 攝國事

光海君이 約 7個月동안 軍國大權을 視政하던 分朝의 사실을 말한다. 宣祖는 그 25年 4月 30日 서울을 떠나서, 同年 5月 1日에 開城에 到着했고, 다시 그 翌日 日本軍의 都城攻陷의 敗報를 接하자 또 開城을 떠나서, 8日에 平壤에 到着했다. 그리고 宣祖는 平壤에 머무는 1個月餘間을 守備策과 收復策을 세우는 데 애썼다. 먼저 明에 請援을 하기로 하여 宣祖 25年 5月 戊子에는 聖節使 柳夢鼎에게 救援을 要請하기로 하고, 明軍의 來援을 기다려서 失地를 收復하기로 했으나, 臨津의 防禦陣이 무너져서 日本軍이 大同江畔에 到着하게 되자, 同年 6月 11日에 請援使 李德馨을 明에 急派하고, 宣祖도 이어 平壤을 떠나서 肅川·安州를 지나 13日에 寧邊에 到着했다. 咸鏡道에 北遷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咸鏡道에의 北遷을 危險하다는 李恒福 등의 主張으로 義州로 가서 明軍을 맞기로 하고, 進路를 變更해서 博川에 나와 義州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同年 6月 13日 寧邊에서의 廟議에서 宣祖는 王世子인 光海君 琿에게 內禪 즉, 國事를 權攝케 할 것을 決意하고, 宣祖自身은 萬一의 경우 遼東에 들어가서 內附해서라도 援兵을 請하기로 했다. 이것이 곧 光海君의 分朝策이었다. 이에 光海君은 宗廟·社稷의 神主를 받들고, 領議政 崔興源·左贊成 鄭琢·型判 李憲國·副提學 沈忠謙⌒知中樞 柳自新·承旨 柳希霖 등을 데리고 宣祖와 離別해서 同年 6月 14日에 寧邊을 떠나 雲山을 지나서 16日 熙川에 到着했다. 그들은 江原道·京畿道 또는 咸鏡道에 가고자 했으나, 日本軍이 이미 咸鏡道에 進入했다는 소식을 듣고 江界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南行하기로 變更하여 同年 7月 9日 江原道 伊川에 도착해서 分朝의 活動을 시작했다. 즉, 各地에 討賊興復의 大義를 諭告해서 義兵의 蜂起를 鼓舞했으나, 日本軍(島津義弘 등의 軍)의 進入으로 同年 7月 28日 不得已 伊川을 떠나서 同年 8月 4日 平安道 成川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도 義州의 宣祖 및 南方諸道와 連絡하는 등 分朝의 活動은 계속 되었지만, 同年 10月 3日 王世子에게 下附한 權攝國事의 政書와 印章이 到着되어 分朝의 規模는 名實共히 갖추어 졌다.

여하간 光海君은 同年 10月 25日 成川을 떠나서 慈山·順川·肅川·安州를 돌아 永柔·甑山·咸從을 지나서 同年 11月 16日 龍岡山城에 到着했다. 다시 同年 11月 25日 龍岡을 떠나서 29日에 寧邊에 到着했다. 이 때는 明將 李如松이 援兵을 이끌고 渡江하여(25日) 義州를 28日에 出發해서 平壤奪還을 꾀하고 있을 무렵이었고, 이 明軍의 平壤奪還이 翌年 正月 8日에 成就되었음이 寧邊의 分朝에 傳해졌다(義州의 行在에는 翌日인 9日에 捷報되었다). 따라서 義州에서의 宣朝는 18日 義州를 떠나서 回還했고, 寧邊에서의 光海君도 19日 그곳을 떠나서 20日 定州에 이르러 宣祖와 만나게 되었다. 이에 7個月동안의 王世子의 分朝는 廢止되었다(以上은 中村榮孝,『前揭書』中, pp.148~154 參考). 여하간 分朝의 例는 光海君 이 후 仁祖期의 丁卯胡亂때도 昭顯世子가 3個月 동안 全州에서 行한 일이 있기도 했다. 모두 國難때의 防禦를 위한 것이었다.

2.『明史』朝鮮列傳 註 601)

朝鮮世子

臨海君 李珒를 朝鮮世子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當時의 王世子는 臨海君의 同母弟인 光海君이었다(註 507)~512)). 그러나 明側에서 臨海君을 王世子로 한 것은 그 역시 이유가 있다. 즉, 前述한 바와 같이 宣祖가 倭軍의 侵寇로 蒙塵을 떠날 때 光海君을 王世子로 삼아서 分朝케 했고, 京城을 收復한 후에도 明側이 朝鮮防衛體制의 確立을 위한 要請에 의해서 撫軍司가 成立될 무렵(『宣祖實錄』宣祖 26年 閏 11月·12月條에 撫軍司의 記事가 仔細하다) 軍政에 關한 重要機構를 王世子 光海君 中心으로 分割構成하여 視務케 했다. 처음에는 이를 分備邊司라고 했다(撫軍司는 이 직후 창설). 王世子인 光海君은 戰爭의 遂行을 위해서 크게 活躍했다.

여하간 宣祖 27年 8月 下旬에 尹根壽를 明에 보내서 光海君의 王世子 册封을 奏請했다. 同年 9月 18日에는 특히 大臣들에게 世子攝政을 命하기도 했다(이 王世子攝政은 諫止되었다). 그러나 明側에서는 王世子의 册封이 拒否되었다. 그렇지만 宣祖는 內政에서는 世子攝政을 몇 번인가 命하기도 했다. 그런데 明에서의 王世子册立 奏請拒否의 事情은『明實錄』萬曆 24年 5月 丁卯條의 禮部題本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禮)部議 主器必長子禮之常也 亂世先有功事之變也’가 그것이었다. 하여간 여기서 臨海君을 ‘朝鮮世子’로 하고 있는 것은 臨海君을 指目한 것이 아니라 朝鮮世子를 指目한 것이지만, 위에 말한 明側의 光海君 册封拒否때문에 世子가 臨海君으로 된 것 같다. 臨海君이 조선에서는 世子가 아니었지만, 明側으로서는 世子册封한 일이 없었고 보면 臨海君이 世子로 되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原文의 다음에 계속되는 記事와 같이 光海君이 明側의 要請으로 全羅·慶尙兩道의 守備를 위해서 宣祖 26年 12月 25日 全州에 到着하여(『亂中雜錄』2, 癸巳 同日條) 軍務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宣祖實錄』宣祖 28年 3月 庚子條의 勅諭에 ‘朝鮮國光海君琿 …… 選帶忠義陪臣 駐剳全慶地方 經理防禦 ……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朝鮮世子’·‘臨海君珒’·‘光海君琿’이 名分과 實質에서 어긋나게 記事化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明史紀事本末』에서는 ‘諭朝鮮世子臨海君琿居全慶督師’라고 하고 있다.

3.『明史』朝鮮列傳 註 604)

諭朝鮮世子臨海君珒居全慶

『宣祖實錄』宣祖 28年 3月 庚子條의 奏請使 尹根壽의 奉勅書에 仔細하다. 『明實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4.『明史』朝鮮列傳 註 654)

禮臣執奏 不從

原文의 萬曆 23年 9月 記事는『明實錄』萬曆 23年 9月 庚午朔條의

朝鮮國王李昖 以長庶子臨海君李珒 久陷賊中 雖獲生還 驚憂成疾 不堪繼嗣 次子光海君李暉(琿) 收集離散 功績茂著 已奉勅諭 駐剳全慶地方 經理防禦 請立爲嗣 禮臣范謙執奏 繼統大義 長幼定分 不宜僭差 奉旨移文止之 至是復以擧國臣民啓狀上陳 且引永樂年間 本國恭定王例 以請事下所司 禮科薛三才參駁其非制 且不宜以播遷之餘 輕率立少 失宗社大計于是 禮臣復奏 李昖以次子請封業 奉明旨報罷 令復執有功之說 謂出自通國之公 卽所奏盡實 臣等何由知之 卽謂世亂先有功 亦宜俟其邦家綏靖而徐議 令日似未可遽許 詔曰可

를 要約한 것이다.

5.『明史』朝鮮列傳 註 656)

二十四年五月 …… 於朝鮮 易封事三疏 力持云

本文의 萬曆 24年 5月의 記事는『明實錄』萬曆 24年 5月 丁卯朔條의 禮部題本을 要約한 것이다. 즉,

禮部題 朝鮮王國 李昖奏 臣守藩無狀 幾墜先臣之緒 令日之所翼 以盖愆者 惟有擇嗣一事而庶子之中 長曰臨海君珒 次曰光海君琿 盖二子同母而母亡 臣固無他意于取舍也 珒性質凡近 臣爲擇師傳 授以經述 求以變化氣質 而旣長之後 亦不遵臣戒君國子民之寄決難承 當曩于萬曆二十年 小邦猝被寇禍國內崩潰 臣分遣諸子 號召四方 以圖收復 而珒往咸鏡道 不善綏集 終陷賊中 琿早自好學 聰明端厚 又能斥去紛華 簡儉自奉 臣謂此子爲賢嗣續之託 夙有所屬 及國土殘破 義州正當賊衡 令暉奉廟社主 從以若干臣僚 往駐江界 倚險自保 …… 臣棲洎一隅所 恃者徒以琿在耳 琿旣陷于賊 其生其死 莫得聞知 及珒自賊中還 驚憂成病 琿于兄弟之間 尤且友敬日篤 故臣于立嗣一節 不復致疑 初疏只照例請封 至于再疏 始擧文武陪臣耆老合詞之請 此實出于群情之不可抑 非臣所得爲己子張皇也 部議 主器必長子禮之常也 亂世先有功事之變也 然所謂有功者心基中興 事同再造 安危所係 智愚相懸 未有一則失德 未彰一則大功 未建可舍此 而立彼者也 朝鮮當臥薪之時 爲當璧之請諒 非曲狥愛憎 自階喪亂而紊亂曲常 秉禮之國 恐非所宜 光海君若能獎率三軍 枕戈待旦 外捍桀黜 內靖郊圻民望所歸 國將焉往 若當擾攘之會 先拂長幼之經 此旣以弟而先兄事 原不順彼 且以强 而凌弱兵 豈無名臣等之執持 非但爲萬世守典禮 亦爲本國計長久也 得旨如議 傳與朝鮮王 尙書范謙 以朝鮮易封一事 己三上疏 時國儲未立 中外愒疑 故部議長少之分儼然 其不可假辭正 而意則微矣

를 간추린 것이다.



 
       

Next   류백손과 류중손(정란공신 적장자)---좌상공파 편집인
Prev   류점 오공신회맹록 서명 수결(충경공파)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