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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증승지공(의남)묘표 (贈承旨公(義男)墓表) 249


증승지공(의남)묘표

贈承旨公(義男)墓表

 

  공(公)의 휘(諱)는 의남(義男)이요, 자(字)는 의보(宜甫)니 광해혼조(光海昏朝)를 당하여 직언(直言)으로 거의 화정(禍穽)에 함입(陷入)케 되었으나 겨우 면하고 반정후에도 나의 가진 바 아조(雅操)를 지키어 마침내 환도(宦途)에 오르지 아니하니 당세 모든 명류(名類)의 추중한 바 되었고 돌아간 후 백여년이 되어도 송모(誦慕)한 이가 많았으니, 아아 아름답도다!   문화류씨(文化柳氏)는 고려(高麗) 대승(大丞) 차달(車達)을 비조(鼻祖)로 하여, 아조(我朝)에 들어와 휘 관(寬)이 있으니 관(官)은 우의정(右議政)으로 시(諡)는 문간공(文簡公)이요, 삼세(三世)를 지내어 휘 희저(希渚)는 부제학(副提學)이니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 용공(用恭)이니 감찰(監察)이요, 조(祖)는 휘 몽삼(夢參)이니 사용(司勇)이요 고(考)는 휘 약(瀹)이니 사과(司果)로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이다. 비(妣)는 평산신씨(平山申氏)니 증령의정(贈領議政) 평산부원군(平山府院君) 화국(華國)의 따님이요 판서(判書) 문절공(文節公) 상(鏛)의 손녀이다.   공이 만력(萬曆) 1583 계미(癸未) 2월4일에 경제(京第)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용의(容儀)가 풍석(豐碩)하고 어음(語音)이 홍량(洪亮)하여 엄연히 장자의 기도가 있었다. 일찍 부모를 잃고 외숙(外叔) 판윤(判尹)인 입(砬)의 집에서 성장했는데 심히 분화(紛華)를 싫어하고, 이감사(李監司) 광(洸)의 집에 장가들었다. 그 종유(從遊)하고 강마(講劘)하는 이는 오직 택당리공(澤堂李公) 식(植) 뿐으로 정계(情契)가 매우 돈독(敦篤)하였다. 1612 임자(壬子)에 사마(司馬)에 오르자 때마침 혼란을 당한지라 남도(南道)로 내려 올제 이공(李公)이 시를 주어 뜻을 통하였다.   공이 일찍 반중(泮中)에 놀게 되매 명망이 높았는데 1617 정사(丁巳) 역륜(斁倫)의 때를 당하여 하인준(河仁俊)이 (672) 란 자가 있어 적신(賊臣) 이첨(爾瞻)의 지시를 받아 선비로 명칭한 자는 문득 흉소중(凶疏中)에 몰래 집어 넣었다. 공이 마침 신방연회(新榜宴會)를 참여하자 인준(仁俊)이 자리에 있는지라, 종일토록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가 인준이 나간 후에 공이 이에 말하되 『어미 없는 자가 나갔으니 가히 술을 마시겠다.』 하였더니, 인준의 혈당(血黨)인 박홍익(朴弘益)과 최(崔) 숙(淑)이 그 말을 듣고 서로 이어 투소(投疏)하여 공을 논척(論斥)하면서 역률(逆律)로 치죄할 것을 청한지라. 공이 화가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을 알고 진천(鎭川) 전려(田廬)로 돌아와 조석으로 명을 기다리던 차에 공의 외종매(外從妹)인 신성군부인(信城君夫人)이 궁금에서 알선하므로써 면하게 되었다.   인조반정초(仁祖反正初)에 공에 대하여 수용의 명이 있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고 당시에 내종(內從) 신공경(申公景)이며 이종(姨從) 구공(具公) 굉(宏)이 다 녹위(祿位)가 높았으나 또한 즐겨 상종하지 않고 고부(古阜) 우계(雨溪)에 퇴거(退居)하여 호산승구(湖山勝區)에 상양자적(徜徉自適)하니 유연히 진세(塵世) 밖에 벗어난 취미가 있었다. 임승지(林承旨) 연(堜)과 신부제학(愼副提學) 천익(天翼) 형제와도 매우 우호하였다. 1636 병자(丙子) 동(冬)에 향인들이 응시하러 상경(上京)하였는데 북구(北寇)가 갑자기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통해 들은 가인들이 곡읍(哭泣)하여 서로 알리는데 공은 홀로 삼자가 부거(赴擧)했어도 생각지도 않고 다만 국사를 걱정하는 말만하며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가 탄복치 않음이 없더라.   1637 정축(丁丑) 이후로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격앙강개(激仰慷慨)하며 항상 춘추일부(春秋一部)를 읽으면서 이때 가히 강론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 춘추라고 하였고, 평거(平居)에 염담(恬澹)하고 간중(簡重)하여 친척의 서륜(叙倫)으로 락사(樂事)를 삼고, 자제를 훈계하되 법도가 있으며 일체 사물로써 자기 심회(心懷)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1642 임오(壬午)에 만륙십(滿六十)으로 몰하니 정월15일이라 장성(長城) 기동(基洞) 을좌(乙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이택당(李澤堂)이 만사에 『벼슬길에 나는 마침 더럽혀졌는데 전원에서 그대 홀로 즐겼구나 서로 저승길에 가서 어떻게 현(賢)과 우(愚)를 비교할고?』하니 이 가히 그 허여(許與)한 바를 알진져!   배(配)는 덕수리씨(德水李氏)니 감사(監司) 광(洸)의 손녀라. 그 부친의 휘(諱)는 안지(安止)요, 고조(高祖)는 좌의정(左議政) 휘 행(荇)이니 세상이 용재(容齋)라 칭하다. 부인이 공보다 17년 먼저 졸하니 묘(墓)는 동원(同原)에 이영(異塋)이다.   삼남을 두었으니 남(男) 장(長)은 무(㮊)니 도사(都事)로 증참판(贈叅判)이요, 차(次)는 반(攀)이니 찰방(察訪)이요, 차(次)는 빈(彬)이니 현령(縣令)이며, 삼녀에 장(長)은 김여상(金汝鏛)이요, 차(次)는 김화일(金華一)이니 생원(生員)이요, 차(次)는 김지강(金之剛)이라. (673)   무(㮊)의 오남(五男)에 한상(漢祥)이요, 한징(漢徵)은 참봉(叅奉)이요, 한명(漢明)은 절도사(節度使)요, 한정(漢禎), 한승(漢昇)이며, 사녀(四女)에 이성구(李聖龜)요, 박필원(朴弼元)은 진사(進士)요, 김(金) 방(昉)이요, 이사술(李思述)이다. 반(攀)의 계자(繼子)는 한징(漢徵)이요, 측실남(側室男)은 한원(漢源), 한위(漢緯), 한근(漢根)이요, 여(女)는 윤이복(尹爾服)이요, 백광벽(白光璧)이다. 빈(彬)의 이남(二男)에 한오(漢五), 한칠(漢七)이요, 여(女)에 박태항(朴泰恒)은 판서(判書)요, 이만영(李晚榮)이요, 이원영(李元榮)이요, 홍우익(洪禹翊)은 현감(縣監)이요, 송필섭(宋必燮)이다. 증현이하(曾玄以下)는 많아서 다 기록(記錄)치 못하고 가장 현저(顯著)한 이는 증손(曾孫)에 진사(進士) 수정(壽鼎)이요, 진사(進士) 수곤(壽坤)이요, 홍문정자(弘文正字) 수함(壽咸)이요, 도사(都事) 수관(壽觀)이요, 현손(玄孫)에 참봉(叅奉) 광현(光顯)이요, 오대손(五代孫)에 생원(生員) 성형(星亨)이요, 육대손(六代孫)에 생원(生員) 인영(仁榮)이다.   아아! 공의 시종(始終) 지절(志節)이 진실로 사람이 미치지 못할 바가 많고, 택당(澤堂)의 만사(輓詞)에 이른바 전원에서 홀로 즐겼다 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한 아우와 세 아들이 상사(上舍)에 연등(連登)하여 다 사적(仕籍)에 오르고 효우와 염백(廉白)으로 세상에 저명(著名)하였으니 공의 교도(敎導)한 바 근본이 있는 것을 가히 알지로다. 공이 재세시(在世時)에는 침륜(沉淪)을 면치 못하였으나 유적의 민멸치 않은 바 이 같고 또 후손이 번연(繁衍)하니 이로써 족히 세상의 선한 사람을 권하리로다. 장차 묘도(墓道)를 표(表)하게 됨에 공의 행록(行錄)으로써 나에게 와서 글을 청한 이는 공의 오세손(五世孫) 진사 성추(星樞)였다.

의정부우찬성겸성균관제주은진송환기찬

 

贈承旨柳公義男墓表

 

公諱義男字宜甫當昏朝以直言幾墮禍穽逮明時以雅操終避宦途甚爲當世諸名勝所推重歿後百餘載尚有慕誦者多嗚呼懿哉文化之柳高麗大丞車達爲鼻祖入我 朝有諱寬位至右揆諡文簡公歷三世至諱希渚副提學寔公高祖也曾祖諱用恭監察祖諱夢參司勇考諱瀹司果贈司僕寺正妣平山申氏贈領議政平山府院君華國女判書文節公鏛之孫也公以萬曆癸未二月十四日生于京第自炙穉容儀豐碩語音洪亮儼然有長者度早失怙恃鞠於舅氏判尹砬家而甚不喜紛華及委禽於李監司洸之門其所從遊講劘惟澤堂李公植情契岳矣壬子登司馬時丁昏亂而方南歸李公贈詩以寓意焉公嘗遊泮中名望甚隆而當丁巳斁倫之日有河仁俊者受賊臣爾瞻指以章甫之名稱者輒竄入凶疏中公適赴新榜宴會而見仁俊在座終日不肯飮及仁俊起去乃曰無母之人旣出可以飮矣仁俊之血黨朴弘益崔淑聞之相繼投疏論斥公請以逆律治之公知禍將不測歸鎭川田廬朝夕待命適以公之外從妹信城君夫人斡旋宮禁而得免焉 仁祖臨御之初公承收用之命而無意仕進雖有內從申公景禛姨從具公宏祿位之盛亦不肯相關也退居古阜之雨溪鄕徜徉乎湖山勝區悠然有出塵之趣而林承旨堜愼副提學天翼兄弟甚相惠好焉當丙子冬鄕人之赴京試者値北宼猝至各其家人哭泣相聞公獨不念其三子之赴擧者而語及國事則涕泗俱下見者莫不歎服丁丑以後杜門歛跡激昻慷慨常覽春秋一部曰今時不可不講者此也平居恬澹自持簡重以處叙親戚爲樂事訓子弟有法度一切不以事物嬰其懷焉壬午年洽滿六十而歿於正月十五日葬于長城之基洞乙坐之原李澤堂輓詩云簪紱吾終累田園子獨娛相隨泉下路何處較賢愚此可以觀其所與也歟配德水李氏監司洸之孫女也其考諱安止高祖左議政諱荇世稱容齋也先公十七年丙寅卒墓與公同原而異塋有三男 (671) 長㮊都事贈叅判次攀察訪次彬縣令三女長金汝鏛次金華一生員次金之剛㮊五男漢祥漢徵叅奉漢明節度使漢禎漢昇四女李聖龜朴弼元進士金昉李思述攀繼子漢徵側室男漢源漢緯漢根女尹爾服白光璧彬二男漢五漢七女朴泰恒判書李晚榮李元榮洪禹翊縣監宋必燮曾玄以下多不能盡錄而顯者曾孫進士壽鼎進士壽坤弘文正字壽咸都事壽觀玄孫叅奉光顯五代孫生員星亨六代孫生員仁榮嗚呼公之始終志節固多人所不及而至若澤堂所謂田園獨娛者豈不卓偉哉一弟三胤之連登上庠俱入仕籍以孝友廉白著于世者亦可見公敎導之有素也雖其在世未免沉淪而遺蹟之不可泯者有如是焉後承蕃衍又足以勸世之爲善者矣今將竪表墓逕而以公行錄來求余文者公之五世孫進士星樞也

議政府右贊成兼成均館祭酒恩津宋煥箕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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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260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편집인 2012/11/28  [653]  
259  교관공(승춘)묘지명 (敎官公(承春)墓誌銘) 267     편집인 2012/11/28  [652]  
258  청헌류공주전 (淸軒柳公澍傳) 266     편집인 2012/11/28  [565]  
257  청헌공(주)묘표 (淸軒公(澍)墓表) 265     편집인 2012/11/28  [580]  
256  경기감사제교류공(희량)약사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264     편집인 2012/11/28  [659]  
255  참판공(희발)약사 (參判公(希發)略事) 263     편집인 2012/11/28  [510]  
254  판서공(희분)약사 (判書公(希奮)略事) 262     편집인 2012/11/28  [689]  
253  판결사공(희담)약사 (判決事公(希聃)略事) 261     편집인 2012/11/28  [554]  
252  시강원필선오촌류공기문묘갈명 (侍講院弼善梧村柳公起門墓碣銘) 260     편집인 2012/11/28  [520]  
251  필선공(기문)자제묘지 (弼善公(起門)自製墓誌) 259     편집인 2012/11/28  [453]  
250  정암공(습)행장 (靖菴公(隰)行狀) 258     편집인 2012/11/28  [906]  
249  뇌천처사공(호)묘표 (磊川處士公(灝)墓表) 257     편집인 2012/11/28  [1035]  
248  충청병사공(성)약사 (忠淸兵使公(星)略事) 256     편집인 2012/11/28  [463]  
247  휴계공(무)약사 (休溪公(懋)略事) 255     편집인 2012/11/28  [752]  
246  예문검열용문공(흠)약사 (藝文檢閱龍門公흠(欽+心)略事) 254     편집인 2012/11/28  [632]  
245  장령공(심)약사 (掌令公(竹+尋)略事) 253     편집인 2012/11/28  [546]  
244  절초당공(훤)묘갈명 (節初堂公(箮)墓碣銘) 252     편집인 2012/11/28  [681]  
243  전라도도사공(효건)묘표 (全羅道都事公(孝健)墓表) 251     편집인 2012/11/28  [613]  
242  낙봉공(충건)삼세효행전 (樂峰公(忠健)三世孝行傳) 250     편집인 2012/11/28  [678]  
 증승지공(의남)묘표 (贈承旨公(義男)墓表) 249     편집인 2012/11/28  [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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