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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壽)墓誌

 

  비로소 내가 어려서 속문(屬文)을 익힐 적에 향린(鄕隣)에서 칭찬하는 말이 겨우 상숙(庠塾) 안에 있고 원방(遠方)에 이름은 듣지 못하였는데 때로 향선생(鄕先生)을 좇아 듣기를 당세의 총각의 수재를 입을 모아 일컬어 말하되 류수재(柳秀才) 곤수(鵾壽)라 하였다. 당시에 이수재(李秀才) 징(懲)과 손수재(孫秀才) 억(億)이 동성(同聲)으로 배출하여 서로 형제가 되어 예원(藝苑)을 주장하니 사람들이 바라보기를 당(唐)나라 문장(文章)인 양(楊) 형(炯), 왕(王) 발(㪍), 노조린(盧照隣), 낙빈왕(駱賓王) 같이 기식(器識)이 과다하다 함으로 내가 당시에 흔연히 사모하여 우러름이 붕조(鵬鳥)가 높게 날아 오르고 땅을 끌어 당길 것 같이 여겼었다.   그 10여년 후에 책을 끼고 산사에 가서 여러 사람 가운데서 이른바 류수재라는 이를 바라보니 이미 성인으로 준수하였었다. 그 학문의 조예가 오로지 위기를 힘쓰고 외유를 생각하지 않으며 멀리 보면 온량(溫良)하고 가까이 보면 엄숙하였다. 고금을 담론(談論)함에 음성이 좌중을 압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반하여 앞에 앉은 사람이 물러가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의리의 분별에 이르러서는 절연하여 가히 범접하지 못할 것이 있었고, 문예(文藝)는 그 여사(餘事)였다.

내가 처음에 듣고 그 문장를 사모 했더니 그를 직접 보기에 이르러 그 실행을 알았다. 그의 친구가 이르되「이 같은 것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구매(九妹)의 집에 후사로 들어가서 부모의 임석(衽席) 사이에 효자라 칭송하고 제매(諸妹)가 공순하다고 칭송하여 규문(閨門) 안에 종시(終始) 위언이 없고 병부(病婦)의 남편이 되어 내외가 화순함이 항상 하루 같고 임석(衽席) 사이에 보호하기를 영아(嬰兒)와 같이하였다. 일찌기 명금(名琴)이 있어 집에 보배로 전하는데 어떤 사람이 빌려가고 돌려 보내지 않았으나 종신토록 한번도 묻지 않았으니 그 기개가 이와 같은지라 다른 것은 무었을 더 언급하랴.」하였다. 내가 그 뒤에 더욱 그 행의를 믿고 막역지우(莫逆之友)로 정하였다.   나이 21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여러번 과거를 보았으나 마침내 급제를 못하였다. 내가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있을 때 천거(薦擧)하여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었더니 얼마 후에 외우(外憂)(부상(父喪))를 당하여 거상하고 임진년(壬辰年)의 난(亂)을 만나서 아들 1인과 함께 동일에 적에게 죽으니 수는 겨우 37세였다. 동시 (714) 에 이수재와 손수재도 다 싹만 나고 무성하지 못하고 또한 군(君)보다 먼저 요사(夭死)한지 이미 오래었다.   아아! 사람이 이같은 재주가 있어 한 세상에 같이 나서 천의가 돕지 않아 이에 그쳤으니 운명일까? 혹 기질이 너무 청수하여 오래 견디지 못함일까? 아니면 생물의 이치가 일찍 성숙하면 일찍 떨어지는 것일까? 가히 알지 못할 일이다.   군(君)의 휘는 곤수(鵾壽)요, 자(字)는 정로(靜老)니 문화류씨(文化柳氏)로 대승(大丞) 휘 차달(車達)의 후예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순(洵)이니 영의정(領議政)이요, 증조(曾祖)의 휘는 응룡(應龍)이니 이조참판(吏曹叅判)으로 증직(贈職)이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조부(祖父)의 휘는 경장(敬長)이니 풍기군수(豐基郡守)요, 부(父)의 휘(諱)는 성남(成男)이니 예빈사부정(禮賓寺副正)이다. 부정(副正)의 형(兄) 휘 덕남(德男)은 상원군수(祥原郡守)니 곧 구녀옹(九女翁)으로 군(君)을 후사로 삼은 분이다. 군(君)이 재취(再娶) 하였으니 선유인(先孺人) 정씨(丁氏)는 참의(叅議) 윤희(胤禧)의 따님이요, 후유인(後孺人) 홍씨(洪氏)는 현감(縣監) 일민(逸民)의 따님인데 각각 일녀만 두고 마침내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묘(墓)는 포천현(抱川縣) 쌍곡리(雙谷里)에 있다.

백사이항복찬

 

七松柳公鵾壽墓誌

 

始余舞勺業屬文鄕隣之譽僅在庠塾之內未有遠名而時從鄕先生獲聞若當世童丱之秀者擧嘖嘖稱曰柳秀才鵾壽時有李秀才懲孫秀才億同聲輩出迭爲魯衛鞅掌藝苑人望之若楊王盧駱而器識過之余當時欣然慕之相望鵬搴顧若飛而控地矣後十餘年負笈山寺衆中得見所謂柳秀才者盖已成俊造其學專務爲己不慕外誘遠而溫如卽之栗如談今說古英音傾座使人娓娓不覺席缺前而至於義理之分有截然不可犯者文藝乃其餘耳余始聞而慕其餘及見而報其實其友人曰此猶未也人也爲后於九妹之家父母衽席之間稱孝諸妹稱悌閨門之內終始無違言爲婿於病婦之室內外順適常如一日衽席之間保之如嬰兒嘗有名琴家傳爲寶人假不歸終身一無問其槩如此他何及隅余然後益信其行定爲莫逆及年二十一成進士累擧卒不第及余爲吏部郞薦爲司圃署別提無何居外憂遭壬辰之亂與子一人同日死於賊壽三十七而同時李秀才孫秀才皆茁然苗而終不秀亦先君夭已久矣嗚呼人有如此才而幷世者天意有不俾而止於是則命歟或得氣之過淸者不耐久耶抑生物之理早熟者亦早謝耶盖不可知也君諱鵾壽字靜老文化柳大丞諱車達之后也高祖諱洵領議政曾祖諱應龍吏曹叅判 贈吏曹判書祖諱敬長豐基郡守父諱成男禮賓寺副正副正之兄諱德男卒官祥 (713) 原郡守卽九女翁而以君后者君凡再娶先孺人丁氏叅議胤禧女後孺人洪氏縣監逸民女各有一女卒無男子子取兄子爲后墓在抱川縣雙谷里

白沙李恒福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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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편집인 2012/11/28  [653]  
259  교관공(승춘)묘지명 (敎官公(承春)墓誌銘) 267     편집인 2012/11/28  [652]  
258  청헌류공주전 (淸軒柳公澍傳) 266     편집인 2012/11/28  [566]  
257  청헌공(주)묘표 (淸軒公(澍)墓表) 265     편집인 2012/11/28  [580]  
256  경기감사제교류공(희량)약사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264     편집인 2012/11/28  [659]  
255  참판공(희발)약사 (參判公(希發)略事) 263     편집인 2012/11/28  [510]  
254  판서공(희분)약사 (判書公(希奮)略事) 262     편집인 2012/11/28  [689]  
253  판결사공(희담)약사 (判決事公(希聃)略事) 261     편집인 2012/11/28  [555]  
252  시강원필선오촌류공기문묘갈명 (侍講院弼善梧村柳公起門墓碣銘) 260     편집인 2012/11/28  [520]  
251  필선공(기문)자제묘지 (弼善公(起門)自製墓誌) 259     편집인 2012/11/28  [453]  
250  정암공(습)행장 (靖菴公(隰)行狀) 258     편집인 2012/11/28  [906]  
249  뇌천처사공(호)묘표 (磊川處士公(灝)墓表) 257     편집인 2012/11/28  [1035]  
248  충청병사공(성)약사 (忠淸兵使公(星)略事) 256     편집인 2012/11/28  [464]  
247  휴계공(무)약사 (休溪公(懋)略事) 255     편집인 2012/11/28  [752]  
246  예문검열용문공(흠)약사 (藝文檢閱龍門公흠(欽+心)略事) 254     편집인 2012/11/28  [632]  
245  장령공(심)약사 (掌令公(竹+尋)略事) 253     편집인 2012/11/28  [546]  
244  절초당공(훤)묘갈명 (節初堂公(箮)墓碣銘) 252     편집인 2012/11/28  [681]  
243  전라도도사공(효건)묘표 (全羅道都事公(孝健)墓表) 251     편집인 2012/11/28  [614]  
242  낙봉공(충건)삼세효행전 (樂峰公(忠健)三世孝行傳) 250     편집인 2012/11/28  [678]  
241  증승지공(의남)묘표 (贈承旨公(義男)墓表) 249     편집인 2012/11/28  [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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