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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절초당공(훤)묘갈명 (節初堂公(箮)墓碣銘) 252


절초당공(훤)묘갈명

節初堂公(箮)墓碣銘

 

  공의 휘는 훤(箮)이요, 자는 여실(汝實)이니 문화인(文化人)이다.   류씨(柳氏)는 고려(高麗) 대승(大丞) 휘 차달(車達)로부터 계통이 나와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우의정(右議政) 문간공(文簡公) 휘 관(寬)은 청백으로 명성이 조야(朝野)에 알려진 분이다. 증조(曾祖)는 휘 용심(用諶)으로 생원(生員)인데 김모재(金慕齋) 사재(思齋) 형제 분을 좇아 수학하였고, 조(祖)는 휘 익(益)이니 증참판(贈參判)이요. 고(考)는 휘 공량(公亮)이니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문무(文武)의 재식(才識)을 겸비했었는데 인조(仁祖) 1624 갑자(甲子)에 억울하게도 참화(慘禍)를 입었다가 곧 설원(雪寃) 복작(復爵)되었으나 사대부들이 지금까지 슬피 탄식하여 마지않는다. 모친은 여흥민씨(驪興閔氏)니 진사(進士) 사온(思溫)의 따님으로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공은 둘째이다.   선조(宣祖) 1586 병술(丙戌)생인데 7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서도(潟)로 유락(流落)하여 비록 난리 속에도 독서를 폐하지 않더니 15세가 못되어 사서(四書)와 이경(二經)을 다 통달하고 최간이(崔簡易) 입(岦)을 좇아 고문사(古文詞)를 배우고 또 시를 시인 이손곡(李蓀谷) 달(達)에게 배웠다. 당시 사대부자제로서 병란(兵亂)을 피한 자가 많아 함께 교류하였는데 학문이 공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십 여년 후에 한양으로 돌아와 대소시험(大小試驗)이 있으면 상등에 뽑히더니 광해군(光海君) 1610 경술(庚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그로부터 벼슬길에 올라 수성금화사별제(修城禁火司別提)를 거쳐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에 조용(調用)되었다가 영동현령(永同縣令)으로 나갔다.

1623 계해(癸亥)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주상이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팔도를 순행해 관리의 선불선(善不善)을 감사하여 승진하고 출척할 때 어사가 돌아와 공의 자상히 백성을 다스리는 선정을 주달(奏達)하니 주상이 승진시키도록 명하였으나 이윽고 자그만 사건으로 버리고 돌아왔다. 그 후 책문으로 한성시(漢城試)에 으뜸으로 합격되니 장계곡(張谿谷) 유(維)가 고시관(考試官)으로 탄식하여 이르기를 "이는 참 문형(文衡)의 솜씨라." 하였다. (681)   얼마 안되어 가화(家禍)를 당하여 묘하(墓下)에서 여묘(廬墓)살이로 종상(終喪)하고 이로부터 과업을 폐하고 이천(利川) 반계동(磐溪洞)에 우거(寓居)하여 오직 산수를 스스로 즐기다가 인조(仁祖) 1628 무진(戊辰)에 감찰(監察)에 제수되었으나 한결 사양하고 돌아왔다. 1635 을해(乙亥)에 종부사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가 만기가 되어 다시 창평현령(昌平縣令)으로 제수된 후 간간히 호조좌랑(戶曹佐郞) 의빈부도사(儀賓莩事)에 제수되었으나 혹 부임하고 혹 사임하였다.   공이 호남(湖南)에 있을 때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증손하여 행하고 또 주자(朱子) 사창법(社倉法)을 써서 흉년을 대비하였다. 방백고(方伯考)에 이르기를 "백성을 교화(敎化)하여 좋은 풍속을 이루었다." 하고, 또 "정사(政事)는 고도(古道)를 준행하였다." 하였다. 창평(昌平)으로 부터 돌아와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향년 76세로 졸하니 1661 신축(辛丑) 7월초5일이었다. 동부(同府) 성재동(聖齋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는데 배위기계유씨(配位杞溪兪氏)와 부장(祔葬)이다. 유씨(兪氏)의 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기(大祺)이다.   사남이녀를 두었으니 성후(誠厚)요, 겸후(謙厚)는 생원(生員)이요, 담후(譚厚)는 승지(承旨)요, 원후(謜厚)는 사정(寺正)이며, 교관(敎官) 홍(洪) 무(茂)와 어진석(魚震奭)은 그 사위이다. 장방(長房)의 남(男)은 순(田+旬)이요, 사위는 이동연(李東淵)이며, 이방(二房)은 사남이니 유(㽥)와 규(畦)는 모두 생원(生員)이고, 례(田+來)는 계부(季父) 후로 출계하고, 주(疇)는 숙부(叔父) 후로 출계하고, 사위는 진사(進士) 한(韓) 빈(鑌)이다. 공의 측출(側出)(서출(庶出))에 일녀가 있어 미가녀(未嫁女)로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죽었는데 나라에서 그 정절을 정표하였다.   공의 인품이 단아하여 일을 당하면 과감히 결단하고 총명함이 남달리 뛰어나 널리 보고 빨리 기억하였으며 더욱 예학에 익숙하였으나 자신을 감추기를 힘써 스스로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명리(名利)와 재화(財貨) 보기를 내 몸을 더럽힘 같이 하고 가세가 청한하여 채소와 거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으나 항상 태연히 즐겁게 지내었다. 형의 손자와 누이의 딸을 어루만져 기르고 결혼을 때맞추어 시키고 친척에도 그 애경(愛敬)을 다하였다. 한편 그릇된 사람은 더불어 사귀지 않고 종일토록 무릎을 꿇고 몸을 바르게 앉아 있으되 질병이 있어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비록 창졸간(倉卒間) 이라도 당황한 모습과 경망한 기색을 보임이 없이 그 덕성이 이와 같았다. 혼조(昏朝)에 있어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흉당의 뜻에 거슬리어 문득 발탁되었다가 도로 해임되고 화고(禍故)를 만나 스스로 시골에 엎드려 지내다가 잠시 녹사(祿仕)(관직(官職))에 나갔으나 자신의 뜻이 아님으 (682) 로 시골에 파묻혀 마침내 자신의 포부를 펴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었다.   절초당(節初堂)이라 자호(自號)하고 문집 몇 권이 있다.   나의 증조 만회공(晚悔公)(이유겸(李有謙))이 일찍 공으로 더불어 친절하여 늙도록 학문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공의 후손 문준(文濬)이 유당(幽堂)(묘(墓))의 지문을 부탁함으로 몽매한 후생으로서 무슨 지식이 있겠는가만 의리에 감히 사양치 못하고 그 가장을 근거하여 글을 짓고 이어 명(銘)에 이르노니,   간이(簡易)와 같은 문장이요, 손곡(蓀谷)과 같은 명시(名詩)로다.   이 두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니 스스로 그 스승을 얻음이로다.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궁한 사람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았도다.   간혹 관직에 나아갔으나 자취가 마음으로 더불어 어겼도다.   여러 고을을 다스림에 유교의 풍화가 진작되었도다.   화국(華國)의 솜씨로 헛되이 전사(田舍)에서 늙었도다.   큰 뜻을 품은 채 돌아가니 명(命)이라 어찌할까.   적막한 편장(篇章)은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도다.   시골의 옛 집은 유풍(遺風)을 상상할 수 있도다.   내가 그 아름다운 덕을 들추어 유궁에 드리노라.

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세자우빈객이재찬

 

節初堂柳公箮墓碣銘

 

公諱箮字汝實文化人柳氏出高麗大丞車達我朝右議政文簡公寬以清白著曾祖諱用諶生員從金慕齋兄弟學祖諱益  贈叅判考諱公亮禮曹叅判有文武才  仁祖甲子枉被慘禍卽伸雪復爵士大夫至今嗟傷之夫人驪興閔氏進士思溫之女兄弟三人公序居二  萬曆丙戌生七歲遭倭亂流落西陬雖兵戈搶攘不廢讀書未成童盡四書二經從崔簡易岦學爲古文詞又學詩於詩人李達士大夫子弟多避兵者與之遊莫或之先也十餘年始還漢師大小發解輒居上流庚戌司馬筮仕爲修城禁火司別提調通禮院引儀出監永同縣令癸亥反正  上遣御史行八路澄汰官吏御史還白公慈詳愛民  命陞叙尋以微事棄歸以策魁漢城試張谿谷維爲考官歎曰此文衡手也未幾丁家禍廬墓下以終喪自是廢擧寓居利川之磐溪洞惟以山水自娛戊辰除監察一謝便歸乙亥由宗簿寺主簿爲和順縣監秩滿復宰昌平間爲戶曹佐郞儀賓莩事或辭或赴公之在湖南增損藍田鄕約以行之又用朱子社倉法以備荒政方伯考曰化民成俗又曰政遵古道自昌平還不復仕年七十六卒辛丑閏七月初五日也葬圽同府聖齋洞負乾之原配杞溪兪氏祔兪氏考同樞大祺擧四男二女誠厚謙厚生員譚厚承旨謜厚寺正洪茂敎官魚震奭其婿也長房男女李東淵二房四男㽥畦皆生員繼季父后疇繼叔父后女進士韓鑌公側出一女未笄而死於丙子亂旌其節公爲人端雅遇事果決聰明絶倫博覽强記尤熟於禮學而務而韜晦不以自居其視名利財貨若浼已然家世清寒蔬糲不給而常逌然也撫育兄孫 (680) 妹女婚嫁以時於親戚極其愛非其人不與交終日危坐不以疾病少懈雖倉卒未嘗疾言遽色其德性如此在昏朝屢第而忤凶黨輒見拔遭罹禍故自屛田畝黽勉祿仕而非其志栖遑下邑卒不得展布所蘊人皆惜之自號節初堂有文集若干卷吾曾祖晚悔公嘗與公友善至老切磋不倦公之後孫文濬托以幽堂之誌後生蒙陋顧何所知識而不敢辭第據其狀而爲之辭系之以銘銘曰 簡易之文蓀谷之詩具此兩美自得其師中丁家難若窮無歸間就祿仕跡與心違數邑絃歌猶見儒化華國之手虛老田舍齎之以歿命也如何寂寥篇章令人吁嗟林泉舊居想像遺風我闡厥美以納幽宮

資憲大夫議政府左叅贊兼世子右賓客李縡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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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260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편집인 2012/11/28  [654]  
259  교관공(승춘)묘지명 (敎官公(承春)墓誌銘) 267     편집인 2012/11/28  [652]  
258  청헌류공주전 (淸軒柳公澍傳) 266     편집인 2012/11/28  [566]  
257  청헌공(주)묘표 (淸軒公(澍)墓表) 265     편집인 2012/11/28  [581]  
256  경기감사제교류공(희량)약사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264     편집인 2012/11/28  [659]  
255  참판공(희발)약사 (參判公(希發)略事) 263     편집인 2012/11/28  [511]  
254  판서공(희분)약사 (判書公(希奮)略事) 262     편집인 2012/11/28  [689]  
253  판결사공(희담)약사 (判決事公(希聃)略事) 261     편집인 2012/11/28  [555]  
252  시강원필선오촌류공기문묘갈명 (侍講院弼善梧村柳公起門墓碣銘) 260     편집인 2012/11/28  [521]  
251  필선공(기문)자제묘지 (弼善公(起門)自製墓誌) 259     편집인 2012/11/28  [453]  
250  정암공(습)행장 (靖菴公(隰)行狀) 258     편집인 2012/11/28  [907]  
249  뇌천처사공(호)묘표 (磊川處士公(灝)墓表) 257     편집인 2012/11/28  [1036]  
248  충청병사공(성)약사 (忠淸兵使公(星)略事) 256     편집인 2012/11/28  [464]  
247  휴계공(무)약사 (休溪公(懋)略事) 255     편집인 2012/11/28  [752]  
246  예문검열용문공(흠)약사 (藝文檢閱龍門公흠(欽+心)略事) 254     편집인 2012/11/28  [632]  
245  장령공(심)약사 (掌令公(竹+尋)略事) 253     편집인 2012/11/28  [546]  
 절초당공(훤)묘갈명 (節初堂公(箮)墓碣銘) 252     편집인 2012/11/28  [681]  
243  전라도도사공(효건)묘표 (全羅道都事公(孝健)墓表) 251     편집인 2012/11/28  [614]  
242  낙봉공(충건)삼세효행전 (樂峰公(忠健)三世孝行傳) 250     편집인 2012/11/28  [679]  
241  증승지공(의남)묘표 (贈承旨公(義男)墓表) 249     편집인 2012/11/28  [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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