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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정암공(습)행장 (靖菴公(隰)行狀) 258


정암공(습)행장

靖菴公()行狀

 

  공(公)의 휘(諱)는 습(隰)이요, 자(字)는 원숙(原叔)이요, 성(姓)은 류씨(柳氏)니 선계(先系)는 문화(文化)에서 나왔으며 자호(自號)는 정암(靖庵)이다.   고려조(高麗朝)에 위(位)는 대승(大丞)에 이르고 익찬훈(翊贊勳)에 녹(錄)한 휘 차달(車達)이 그 상조(上祖)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문인이 있어 6세손 휘 공권(公權)은 관(官)이 참지정사정당문학(叅知政事政堂文學)으로 시(諡) 문간(文簡)이니 여조명신(麗朝名臣)이요. 휘 택(澤)은 좌복사(左僕射)요, 휘 경(璥)은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세자사(世子師)로 시(諡) 문정(文正)이요, 삼세(三世)를 지내어 휘 유(濡)가 있으니 나주목사(羅州牧使)요, 휘 호(滸)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이요, 아조(我朝)에 와서 판윤(判尹)의 손(孫) 휘 자청(自淸)은 단묘충신(端廟忠臣)인 휘 성원(誠源)과 종형제간(從兄弟間)이라 병자(丙子)에 화(禍)가 일어남에 가권(家眷)을 이끌고 남하(南下)하여 은거(隱居)하다. 자청(自淸)의 자(子) 휘 간(澗)은 유일(遺逸)로 참봉(叅奉)을 천수(薦授)하니 공의 고조(高祖)가 되고, 증조(曾祖) 휘 효정(孝汀)은 성균진사(成均進士)인데 초휘(初諱)는 인정(仁汀)이러니 일찍 말하기를 인자(人子)가 되어서는 마땅히 효를 다할 것이니 효는 백행의 근원이라, 효자로 휘를 고치고 양친이 몰한 후에는 다시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고, 조(祖)의 휘는 계천(繼川)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요, 고(考)의 휘는 수강(壽江)이니 참봉(叅奉)이요, 비(妣)는 일선김씨(一善金氏)니 종성부사(鍾城府使) 연(緣)의 따님으로 농암선생(籠巖先生) 주(澍)의 5대손이라, 홍치(弘治) 1504 갑자(甲子) 모월 일에 공을 생하다.   공이 어려서 특이한 자질이 있으므로 참봉공(叅奉公)이 심히 기특이 여기더라, 이미 상학(上學)함에 경(經)과 사(史)의 대의를 통하지 않음이 없고 글쓰는 재능이 숙취하고 덕기가 응중(凝重)하여 이미 성인 같다는 칭찬이 있었다. 20에 처부(妻父) 우암(牛巖) 이선생(李先生)에게 나아가 배울 때 학문하는 대방(大方)을 듣고 이로부터 배우고 연구함이 더욱 독실하여 서(書)마다 관통치 않음이 없었고 더욱 중용일서(中庸一書)에 착력(着力)하여 일찍 (692) 말하되 중용(中庸)은 이 전성(前聖)의 심학을 전수(傳授)한 요결(要訣)이라 이(理)는 은미하고 지(旨)는 심오하니 뜻을 극히 하여 연구하고 탐색하기를 깊이 아니하면 만에 하나도 헤아리기 어려웁다 하고 송독(誦讀) 완미(玩味)하여 거의 침식을 잃어버리다. 시가 있으니 이르되 『무궁한 이를 알고자 할진대, 먼저 누(縷)와 호(毫)를 분석함과 같이 할찌로다. 높은 하늘은 조화를 포함하고, 큰 바다는 파도(波濤)를 함축 하도다.』 하고, 또 정의음(情意吟)을 지어 설명하여 말하되 주부자(朱夫子) 일찍이 이르되 성(性)이 발하여 정이 되고 심이 발하여 의(意)가 된다 하시니 대개 이치가 중에 갖추어 끝이 외에 나타남은 정의 발함이요, 기미가 은미한 곳에 움직여 그 사이에 계교(計較)한 것은 의의 발함이라 하고, 또 말하되 심은 성(性)의 체(體)로 정(情)의 용(用)을 발하는데 의(意)는 이 정(情)을 인연하여 것인즉 성(性)과 정(情)과 심(心)과 의(意)가 처음은 양건(兩件)인 물사(物事)가 아니라 하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 『누가 심성의 발함이 처음에는 두가지 조목(條目)이 아닌 줄을 알가? 비교하여 옴에 개자(芥子)라도 체류 되었는가 의심하다가 느낀 곳에는 추호(秋毫)를 용납지 못한다.』 하였으니 이곳에 나가 또한 가히 궁리(窮理)의 일단을 증험하리로다.   거처하는 실을 명하여 이르되 정암(靖庵)이라 하다. 친히 고인의 격언(格言)과 의행을 초록(抄錄)하여 좌우에 걸어서 자경잠(自警箴)을 삼고 실중(室中)에 다른 물품은 없고 다만 한 비궤(棐几)와 한 포천(蒲薦)과 일부 중용(中庸)만 있을 뿐이오, 종일토록 엄연(儼然)이 위좌(危坐)하므로 의용(儀容)이 단정하고 엄숙하였다. 이에 우암공(牛巖公)이 일찍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류모(柳某)는 가히 독실히 배운 군자라 말할 것이라 하였다. 공이 예학(禮學)에 정밀하여 그 길흉과 상변(常變)을 강구(講究)하여 증정(證正)치 않음이 없어 혹 질문자(質問者)가 있으면 반드시 고금(古今)을 참작(叅酌)하여 정(情)과 문(文)을 곡진(曲盡)히 가르쳐 주었다. 일찍 말하여 이르되 제사(祭祀)의 절차는 풍하고 약함에 있지 않으니 사서인(士庶人)의 집이 가난하여 예를 맞추어 물품을 갖출 수 없으면 스스로 마땅히 견결(蠲潔)함에 가의(加意)하여 나의 성경(誠敬)을 다한즉 그 보본(報本) 추원(追遠)의 도(道)에 또한 거의 미치리라 하고, 그 거상(居喪)함에 예법을 지킴이 심이 엄하여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를 준수하니 향리(鄕里)의 호례가(好禮家)들이 모두 취하여 법을 삼았으며, 벗을 사귐에 반드시 단방(端方)하고 순실(純實)한 이만 취하여 세리(勢利)에 동요되지 않고, 인척(姻戚)과 고구(故舊)의 상(喪)을 들으면 반드시 위(位)를 설치하고 곡(哭)하며, 인(人)의 사(死)에 조상(吊喪)함에 또한 소식을 먹으며, 전(田)이 타인의 밭두둑으로 이웃이 되였는데 타인이 일묘(一畝)를 월경(越耕)하니 가동(家僮)이 그 연유를 고하거늘, 공이 웃으며 이르되 어찌 일묘의 사소한 관계로 도리어 동정(同井)의 정의(情誼)를 잃을 수 있느냐? 고인 (693) 이 이르되 종신(終身)토록 밭두둑을 양보하여도 일단보(一段步)도 잃지 않는다 함이 망언(妄言)이 아니라 하더라.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춘하(春夏)의 가절를 당하면 관동(冠童)을 이끌고 술병을 차고 높은 곳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해가 지도록 돌아올 줄을 망각하고 동유자(同遊者) 더러 말하되 고인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소풍하는 즐거움은 고상한지라 따라갈 수 없으되 이제 이에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逍遙)하고 유영(遊詠)함이 또한 족히 세속을 잊고 가슴 상쾌하게 함이라 하였다. 손수 소나무와 대나무를 정원(庭園)에 심고 날마다 그 가운데 거처하여 세한(歲寒)의 기대를 스스로 부치고 비록 왼집이 소연(蕭然)하여도 이연(夷然)히 뜻을 두지 않더라. 벼슬하는 친우가 지내다가 공의 집이 풍우를 가리지 못함을 보고 우전(禹篆)를 색인 유산(油傘)과 당시를 쓴 화장(畵章)을 드리니 공이 말하기를 이런 물품이 어찌 한사(寒士)의 집에 합당하겠는가? 증자(曾子) 문하에 빛나고 환한 것을 경계(警戒)하지 않았는가? 의로는 비록 감격(感激)하나 분수(分數)에는 마땅치 않는 바라하고 마침내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선조(宣祖) 초(初)에 행의(行誼)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叅奉)을 제수(除授)하되 사양하여 나가지 않고 이르되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잡음이 스스로 지락(至樂)이 있거늘, 만일 사진(仕進)을 무릅쓰고 봉록(俸祿)을 탐하여 능히 시국을 경영하고 민(民)에 혜택이 없으면 나의 부끄러움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어떤 사람이 혹 벼슬를 권(勸)하면 대답하기를 사람의 병(病)은 다만 학의 미능(未能)함에 있고, 녹(祿)을 구함은 내 능히 알바 아니라 하였다. 만년에 후학을 성취시킴으로 자기(自己) 임무를 삼아 날마다 원근(遠近)에서 와서 배운 선비로 더부러 경서(經書)의 뜻을 강론(講論)하여 확정하고 자격(資格)에 따라 설교(說敎)하니 문생(門生)들이 훌륭하여 단정한 선비가 많더라. 융경(隆慶) 1570 경오(庚午) 모월 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향년이 67이었다. 분묘(墳墓)도 또한 병화(兵禍)에 실전되어 실로 자손의 무궁한 원한이 되더라.   배(配)는 영천리씨(永川李氏)니 부(父)는 휘(諱) 세헌(世憲)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증좌승지(贈左承旨)요, 호(號)는 우암(牛巖)이니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문장(文章)과 덕행이 사림(士林)의 종앙(宗仰)한바 되어 옥천사(玉川祠)에 타향(妥享)하였다가 후(後)에 오양사(梧陽社)에 이봉(移奉)되다. 부인이 가정의 예법에 유염(擩染)되어 여사행(女士行)이 있어 아름다운 규범으로 집안을 통률(統率)하니 향당(鄕黨)이 칭찬하더라.   일남일녀를 두니 남(男)은 원종(元宗)이요, 여는 박장춘(朴長春)이니 진사(進士)이다. 원종(元宗)의 남은 정국(定國)이니 참봉(叅奉) (694) 이다. 정국은 이남이니 복영(復榮)이며 진영(振榮)은 직장(直長)으로 성현찰방(省峴察訪)이다. 복영의 남(男)은 득잠(得潛)이오, 여(女)는 김상신(金尙信)이며, 진영(振榮)은 사남이니 한서(漢瑞)요, 한상(漢祥)이요, 한정(漢禎)은 호오원(號烏園)이요, 한기(漢祺)요, 여(女)는 이안희(李安禧)이다. 박장춘(朴長春)의 남(男)은 무선(茂先)이오 여(女)는 정(鄭) 결(潔)이며, 무선(茂先)은 사남이니 육(䡜)과 율(車+栗) 소(輎)와 용(䡥)이요, 정(鄭) 결(潔)의 남(男)은 계도(啓道)요. 여(女)는 김(金) 영(寧)이니 문과(文科)로 사예(司藝)라, 내외 증손은 다 기록치 못한다.   공이 품성이 두터움으로 충양(充養)이 본래 있어 내수(內守)가 이미 전일(專一)함에 외모가 들어오지 못하여 의지는 결백하고 행동은 근신하였으며, 예(禮)는 겸비(謙卑)하고 말은 손순하므로 구고(九皐)의 학(鶴)소리 상천(上天)까지 사모친데 원(猿)과 조(鳥)의 맹서(盟誓)는 더욱 굳세어 싸두고 팔지 않어 봉필(蓬蓽)(빈한(貧寒))로 명(命)을 마침은 대개 당시에 사화(士禍)가 여러번 일어나므로 출처의 의(義)가 본래 정(定)함이요, 소(篠)와 궤(簣)로 세상을 잊고 과단(果斷)한 자(者)의 비(比)할바 아니다. 시(詩)와 문(文)도 또한 성정(性情)에서 유출되어 화채(華彩)를 일삼지 않으되 창연하고 울연하여 고기(古氣)가 있었다.   평생 저술이 반드시 전할 것이 많을 것이로되 여러번 병화(兵火)를 격어 남은 것이 얼마 없으나 그러나 그의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정의음(情意吟)의 지음과 문생을 권유하고 아조(兒曹)를 경계한 시와 오우조(五憂條)와 칠외목(七畏目)의 잠(箴)은 그 은근히 사람에게 보여주는 뜻과 독실히 도를 구한 방법이 가는데 마다 체득하여 알고 몸소 행한 실적이 아님이 없었다. 일즉 문소(聞韶)(의성(義城)) 사우(士友)로 더부러 빙계(氷溪)에 놀면서 시(詩)와 서(序)가 있으니 하빙(夏氷)의 특이함을 깊이 연구하고 음양의 심오함을 발견하여 말하되 여름이 이른즉 양(陽)은 위로 오르고 음(陰)은 아래로 숨는데 혈(穴)이 지하로 통한 때문에 여름을 당함에 복장(伏藏)한 음(陰)이 교체하여 오르는데 얼음이 언다 하니 이는 대개 전인(前人)의 발견치 못함을 발견함이러라. 후일에 허문정공(許文正公)이 빙혈(氷穴)을 기록하면서 입언(立言)함이 또한 이로 더부러 우연히 부합하니 공의 이기(理氣)를 밝힘이 정밀치 않으면 어찌 이에 참여하리요? 공의 임하(林下)에 우유(優游)한지 60여년에 작록(爵錄)을 마음에 들이지 않고 훈학(訓學)을 가정에서 나지 않아 강구(講究)함의 풍후함과 천행함의 독실함이 마땅히 크게 사람에게 지난 것이 있을찌로데 세대를 지냄이 더욱 오래고 영향이 거듭 아득하여 평소의 행치(行治)와 조예(造詣)의 천심을 따라서 그 자상함을 얻을 수 없은즉 후의 상론(尙論)한 군자(君子)가 어찌 이에 유감이 없을소냐? (695)   공의 후손 평우(平佑)가 나를 금학산하(金鶴山下)로 찾아와 가장(家狀)을 주며 이르되 나의 선조가 살아서는 명위(名位)가 드러나지 않고 돌아가신 뒤에는 자손이 영산(零散)되어 유풍(遺風)과 여운이 날로 감추어졌는데 다행이 공의 손(孫) 참봉공(叅奉公)이 쓰신 유사(遺事)와 시문(詩文) 잡저(雜著) 약간편(若干篇)이 고지(故紙)에 쌓인 가운데 연기(煙氣)에 끄슬리고 좀이 먹은 나머지 것을 이제 수집하고 선사(繕寫)하여 일책(一册)을 만들어 영구이 전하기를 도모하는바, 그 교정과 칭술(稱述)은 이미 홍(洪), 이(李) 제공(諸公)이 대략 기재함이 있으되 다만 이 행장(行狀)의 글은 아직껏 촉필(屬筆)치 못하였으니 집사(執事)의 도모함을 생각한다 하였다. 회고(回顧)컨데 나는 문사(文辭)에 졸렬(拙劣)하고 찬술(撰述)이 그 직(職)이 아니며, 또한 늙어 정신이 어두워 세대의 고거(考據)도 망연하니 장차 무슨 일을 비거(比擧)하여 말을 만드랴? 이러므로 정중(鄭重)이 여겨 감히 붓을 들지 못한지 오래로되 가만이 생각하면 공이 나의 집과는 이미 고향(故鄕)의 구의(舊誼)가 있고 또 인척(姻戚)의 숙계(夙契)가 있으니 이제 이 일을 끝내 사양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참률(僭率)함을 헤아리지 않고 한결 같이 가장(家狀)에 의하여 안본(按本)을 삼고 대략 서차(叙次)를 더하기를 우(右)와 같이 하여 자손의 청에 보답하고 또 후일에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채택이 있기를 기다리노라.

가선대부행전한성부좌윤겸오위도총부부총관영양이희발근찬

 

靖菴柳公隰行狀

 

公諱隰字原叔姓柳氏系出文化自號靖菴高麗位大丞錄翊贊勳曰車達其上祖也自是世有聞人六世孫諱公權官叅知政事政堂文學諡文簡爲麗氏名臣生諱澤左僕射生諱璥修文殿太學士世子師諡文正歷三世有諱濡羅州牧使諱滸漢城判尹入我朝判尹之孫諱自淸  端廟忠臣諱誠源之從昆 季也景泰禍作挈家而南以晦跡焉是生諱澗以遺逸薦授寢郎於公爲高祖曾祖諱孝汀成均進士初諱仁汀嘗曰爲人子當止於孝孝者百行之源以孝字改諱親沒不復留意仕進祖諱繼川成均進士考諱壽江叅奉妣一善金氏鍾城府使緣之女籠巖先生澍之五代孫也以弘治甲子某月日生公幼有異質叅奉公甚奇之旣上學經史大義無不通曉藻思夙就德器凝重已有成人之譽弱冠就外舅牛巖李先生學問爲學大方自是種績益厚於書靡不淹貫而尤着力於中庸一書嘗曰中庸是前聖心學傳授之要訣理微旨奥非極意研賾之深難以窺測萬一誦讀玩味殆忘寢食有詩曰欲識無窮理先從析縷毫穹天包造化鉅海滀波濤又作情意吟爲說以明之曰朱夫子嘗曰性發爲情心發爲意盖理具於中而端見於外者情之發也幾動於微而計較其間者意之發也又曰心以性之體發情之用而意是緣情反覆者則性情心意初非兩件物事其詩曰誰知心性發初非兩件條較來疑滯芥感處不容毫卽此而亦可驗其窮理之一端矣扁所居室曰靖菴手抄古人格言懿行揭之座右以爲常目之資室中無他物只有一棐几一蒲薦一部中庸而已終日儼然危坐儀容整肅牛巖公嘗語人曰柳某可謂篤學君子也公精於禮學其於吉凶常變靡不講究證正人有來問者必叅酌古今曲盡情文以吿之嘗曰祭享之節 (690) 不在豐約士庶家貧無以式禮具品自當加意蠲潔盡吾誠敬則於報本追遠之道亦庶幾矣其居憂也守制甚嚴一遵朱文公家禮鄕里好禮之家皆取以爲法焉交友必取端方純實者不爲勢利所動聞姻戚故舊之喪必設位而哭吊人之死亦茹素有田與人隣畔人有越耕一畝家僮來吿公笑曰豈以一畝之故而反失同井之誼古人云終身讓畔不失一段勿妄語也性佳好山水每當春夏令節携冠童挈壺榼登高舒嘯沿溪溯洄盡日忘歸語同遊者曰古人浴沂風雩之樂尙矣莫追而今此逍遙游詠於泉石之間亦足以蕩塵累爽襟懷手植松竹於庭曰靜處其中托以歲寒之期雖環堵蕭然而夷然不以爲意也有親友作宰者過公居見數椽不庇風雨遺以禹篆油傘唐詩畵障公曰此物豈寒士家所宜况有曾門華晥之戒乎義雖可感分所不稱竟辭不受 宣廟初以行誼除慶基殿叅奉而辭不起曰採山釣水自有至樂若冒進貪祿而不能經時澤民則非吾所愧乎人或勸之仕則曰人之病只在學未至而干祿吾斯之未能信也晚年以成就後學爲己任日與遠近來學之士講確經旨隨材說敎門生子弟彬彬多雅飭士以隆慶庚午某月日考終于寢享年六十七衣履之藏亦失於兵燹實子孫無窮之慟云配永川李氏父諱世憲成均進士 贈左承旨號牛巖以己卯名賢文章德行爲士林所宗仰爼豆於玉川祠後移梧陽社夫人擩染家庭有女士行以懿範帥家鄕黨稱之有一男一女男元宗女朴長春進士元宗一男定國叅奉定國二男復榮振榮直長省峴察訪復榮一男得潛一女金尙信振榮有四男漢瑞漢祥漢禎號烏園漢祺女李安禧朴長春一男茂先女鄭潔茂先四男䡜輎䡥鄭潔一男啓道女金寧文科官司藝內外曾玄殆不可記公以禀賦之厚充養有素內守旣專外慕不入志潔行修禮卑言遜皐鶴之聲上徹而猿鳥之盟彌堅蘊而不巿蓬蓽以終盖以當時士禍屢作出處之義素定而非篠簣果於忘世者比也詩文亦流出性情不事藻繢蒼菀有古氣生平著述必多可傳而屢經灰劫存者無幾然其讀中庸情意吟之作勸門生戒兒曹之詩五憂條七畏目之箴其惓惓示人之意慥慥求道之方無往非體認躬行之實也嘗與聞韶士友游氷溪有詩若序深究夏氷之異以發陰陽之奥以爲夏至則陽升上陰伏下而穴通地下故當夏伏藏之陰交升而氷凝此盖發前人所未發後來許文正公記氷穴而立議亦與此偶合非公燭理之精安得與於此哉盖公優游林下六十餘年爵祿不入於心訓學不出於家種績之富 (691) 踐行之篤宜有以大過人者歷世滋久影響愈邈平居行治與所造深淺無從鎰其詳焉則後世尙論之士烏得無憾於是乎日公之後孫平佑訪余金鶴山下授之以家狀曰吾祖生而名位未顯沒而雲仍零散遺芬剩馥日以翳然而惟有公之孫叅奉公所草遺事及詩文雜著若干篇在故紙堆中煙煤蠧蝕之餘者今方蒐輯繕寫爲一册以圖永久其勘校稱述已有洪李諸公之畧識而惟是狀行之文尙未有屬筆惟執事圖之顧余拙於文辭撰述非其職重以老耄神識全昧世代茫然考据將何以比事屬辭以是鄭重不敢下筆者久焉第念公於吾家旣有桑梓舊誼又有葮莩宿契今於是役也有不得終辭者遂乃不揆僭率一依家狀爲按本畧加叙次如右以塞慈孫之請且以俟異日立言君子之有所裁擇云爾

嘉善大夫行前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永陽李羲發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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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260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편집인 2012/11/28  [654]  
259  교관공(승춘)묘지명 (敎官公(承春)墓誌銘) 267     편집인 2012/11/28  [652]  
258  청헌류공주전 (淸軒柳公澍傳) 266     편집인 2012/11/28  [566]  
257  청헌공(주)묘표 (淸軒公(澍)墓表) 265     편집인 2012/11/28  [580]  
256  경기감사제교류공(희량)약사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264     편집인 2012/11/28  [659]  
255  참판공(희발)약사 (參判公(希發)略事) 263     편집인 2012/11/28  [510]  
254  판서공(희분)약사 (判書公(希奮)略事) 262     편집인 2012/11/28  [689]  
253  판결사공(희담)약사 (判決事公(希聃)略事) 261     편집인 2012/11/28  [555]  
252  시강원필선오촌류공기문묘갈명 (侍講院弼善梧村柳公起門墓碣銘) 260     편집인 2012/11/28  [520]  
251  필선공(기문)자제묘지 (弼善公(起門)自製墓誌) 259     편집인 2012/11/28  [453]  
 정암공(습)행장 (靖菴公(隰)行狀) 258     편집인 2012/11/28  [906]  
249  뇌천처사공(호)묘표 (磊川處士公(灝)墓表) 257     편집인 2012/11/28  [1035]  
248  충청병사공(성)약사 (忠淸兵使公(星)略事) 256     편집인 2012/11/28  [464]  
247  휴계공(무)약사 (休溪公(懋)略事) 255     편집인 2012/11/28  [752]  
246  예문검열용문공(흠)약사 (藝文檢閱龍門公흠(欽+心)略事) 254     편집인 2012/11/28  [632]  
245  장령공(심)약사 (掌令公(竹+尋)略事) 253     편집인 2012/11/28  [546]  
244  절초당공(훤)묘갈명 (節初堂公(箮)墓碣銘) 252     편집인 2012/11/28  [681]  
243  전라도도사공(효건)묘표 (全羅道都事公(孝健)墓表) 251     편집인 2012/11/28  [614]  
242  낙봉공(충건)삼세효행전 (樂峰公(忠健)三世孝行傳) 250     편집인 2012/11/28  [678]  
241  증승지공(의남)묘표 (贈承旨公(義男)墓表) 249     편집인 2012/11/28  [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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