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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경기감사제교류공(희량)약사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264


경기감사제교류공(희량)약사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공의 휘는 희량(希亮)이요, 자는 용경(龍卿)이요, 호는 제교(霽嶠), 또는 봉음(峯陰)이니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자신(自新)의 오자(五子)로 선조(宣祖) 1575 을해(乙亥) 4월3일생이다.   1603 계묘(癸卯)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1605 을사(乙巳) 7월에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의 비행(非行)을 상소로서 배척하고, 이듬해 정월 상소로써 오현(五賢)의 승무(陞廡)를 청하였으니 이는 곧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李) 황(滉) 등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일이었다.   광해군(光海君) 원년 1608 무신(戊申)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설서(說書) 정언(正言) 전한(典翰) 전랑(銓郞)(이조정랑(吏曹正郞)) 교리(校理) 수찬(修撰) 지평(持平) 사인(舍人) 직제학(直提學) 집의(執義) 사복사정(司僕寺正)을 거쳐 1616 병진(丙辰)에 형 희발(希發)과 함께 호당(湖堂)에 선입되었다. 그 후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의(刑曹叅議) 좌(左)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곧바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재직중 상소로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얼마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가 임기를 마치고 예조참판(禮曹叅判)에 전직되었다. (704)   1623 계해(癸亥) 3월 반정으로 인하여 파직,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더니 수년 후 조카 효립(孝立)의 역모에 연좌되어 마침내 거제(巨濟) 처소에서 교형을 당하니 때는 인조(仁祖) 1628 무진(戊辰) 정월23일로 향년 54세였다.   공은 청렴검약(淸廉儉約)으로 지조를 지키어 사물에 구애하지 않았고, 사람을 접함에 극히 종용(從容)(안온(安穩))하였다. 비록 관직과 신분이 높았으나 집은 매우 가난하였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써 명성이 있었다.   일찌기 청음(淸陰) 김공상헌(金公尙憲) 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장차 망할 것이요, 사람의 집에 좋은 것이 하나만 있어도 사람의 욕심이 되어 끝내는 자신을 망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의 욕심내 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고 또한 난세에 척리(戚里)(왕(王))의 외척가 되는 데야!" 하였다. 유배의 길을 떠나기에 이르러 또 청음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자제들이 귀하게 생장하여 이제 궁벽한 시골에 유배되니 필시 그 고초를 이기지 못하고 잘못된 마음이 생길 것인바, 우리 집안에 살아 남을 자 없을 것이요."하였다.   1628 무진(戊辰)에 그 아들 두립(斗立)이 종형(從兄) 효립(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복주되고, 공 또한 죽게 되었는데 여러 동료들이 공의 평소에 근신했던 인품을 생각하여 살리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각기 서신을 써서 결별을 고하였다. 공이 김오랑(金吾郞)(의금부도사(義禁莩事))에게 일러 말하기를 "아이들이 멀리 있어 역모를 꾀했는 지는 내 실로 모르겠으나 국법이 있으니 어찌 면하겠는가? 내 일찌기 자호(自號)를 제교(霽嶠)라 하였더니 이제 이곳 거제에서 죽게 되니 전생에 정한 운명은 도망하지 못하는가 보오." 하고, 각기 답서를 써서 부친 후 조용히 형장에 나가 생을 마치었다.   택당(澤堂) 이공(李公) 식(植)은 이르기를 "마땅히 그는 청렴한 척리(戚里)라 이를 것이다." 라고 말하고, 미수(眉叟) 허(許) 목(穆)은 그의 기언(記言)에 이르기를 "이 사람은 본래 어질고 착함으로 일컬었으며, 그 부자간에 일찌기 폐비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었다." 하였고, 정욱선(鄭勖先)은 이르기를 "밤중에 이 상소문을 읽고 또한 기분이 상쾌함을 깨달았다." 고 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국조방목(國朝榜目) 조야집요(朝野輯要)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호보(海東號譜)를 살펴 기록하였다. (705)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公諱希亮字龍卿號霽嶠峯陰文陽府院君自新五子宣祖乙亥四月三日生癸卯中生員試乙巳七月與諸館儒疏斥鄭仁弘之非行翌年正月疏請五賢陞廡是金寒暄堂宏弼鄭一蠹汝昌趙靜菴光祖李 (703) 晦齋彦迪李退溪滉等文廟從祀事也光海君元年戊申擢文科歷檢閱說書正言典翰銓郎校理修撰持平舍人直提學執義司僕寺正丙辰與兄希發選入湖堂自後歷同副承旨刑曹叅議左右副承旨旋以弘文館副提學疏請辭職而不允未幾出爲京畿道觀察使瓜滿轉禮曹叅判癸亥三月因反正見罷謫巨濟島數年後因坐姪孝立之逆謀遂絞刑於巨濟處所時仁祖戊辰正月二十三日享年五十四公淸儉守操不拘事物接人極爲從容雖至宦達家甚淸寒特有善書名嘗語淸陰金公尙憲曰吾門將盡劉乎人家有一長物爲人所欲亦足爲殺身況人所欲者非一二而況亂世戚里乎及竄臨行又言於淸陰曰吾門子弟生長綺紈今謫窮荒必不堪其苦乃生邪念吾門必無噍類矣戊辰其子斗立坐從兄孝立之獄而伏誅公亦當死諸僚以公平日素謹愼欲貸之不得各以手書吿訣公謂金吾郎曰兒輩在遠謀逆吾實不知而國法自在何免焉吾嘗自號霽嶠今死巨濟前定不可逃也各修答以付從容就死澤堂李公植曰宜其謂淸戚里許眉叟穆記言曰斯人素稱良善其父子有斥廢妃疏鄭勖先曰中夜誦此疏亦覺氣爽此按朝鮮王朝實錄若國朝榜目朝野輯要燃藜室記述海東號譜而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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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편집 및 정리 : 류영렬, 2012)


 
       

260  칠송공(곤수)묘지 (七松公(鵾壽)墓誌) 268     편집인 2012/11/28  [654]  
259  교관공(승춘)묘지명 (敎官公(承春)墓誌銘) 267     편집인 2012/11/28  [652]  
258  청헌류공주전 (淸軒柳公澍傳) 266     편집인 2012/11/28  [566]  
257  청헌공(주)묘표 (淸軒公(澍)墓表) 265     편집인 2012/11/28  [581]  
 경기감사제교류공(희량)약사 (京畿監司霽嶠柳公(希亮)略事) 264     편집인 2012/11/28  [659]  
255  참판공(희발)약사 (參判公(希發)略事) 263     편집인 2012/11/28  [511]  
254  판서공(희분)약사 (判書公(希奮)略事) 262     편집인 2012/11/28  [689]  
253  판결사공(희담)약사 (判決事公(希聃)略事) 261     편집인 2012/11/28  [555]  
252  시강원필선오촌류공기문묘갈명 (侍講院弼善梧村柳公起門墓碣銘) 260     편집인 2012/11/28  [521]  
251  필선공(기문)자제묘지 (弼善公(起門)自製墓誌) 259     편집인 2012/11/28  [453]  
250  정암공(습)행장 (靖菴公(隰)行狀) 258     편집인 2012/11/28  [907]  
249  뇌천처사공(호)묘표 (磊川處士公(灝)墓表) 257     편집인 2012/11/28  [1036]  
248  충청병사공(성)약사 (忠淸兵使公(星)略事) 256     편집인 2012/11/28  [464]  
247  휴계공(무)약사 (休溪公(懋)略事) 255     편집인 2012/11/28  [752]  
246  예문검열용문공(흠)약사 (藝文檢閱龍門公흠(欽+心)略事) 254     편집인 2012/11/28  [632]  
245  장령공(심)약사 (掌令公(竹+尋)略事) 253     편집인 2012/11/28  [546]  
244  절초당공(훤)묘갈명 (節初堂公(箮)墓碣銘) 252     편집인 2012/11/28  [682]  
243  전라도도사공(효건)묘표 (全羅道都事公(孝健)墓表) 251     편집인 2012/11/28  [614]  
242  낙봉공(충건)삼세효행전 (樂峰公(忠健)三世孝行傳) 250     편집인 2012/11/28  [679]  
241  증승지공(의남)묘표 (贈承旨公(義男)墓表) 249     편집인 2012/11/28  [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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